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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E H I N D   S T O R Y



‘근거 있는’ 자신감의 화가
얀 판 에이크

 


newlooks


15세기, 북유럽 미술의 판도를 바꾼 예술가가 있었다. 얀 판 에이크는 유화라는 화법을 극도로 발전시키며 빛과 색채, 그리고 세밀한 디테일로 현실을 화폭 안에 담아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현실을 사진 찍은 것처럼 그림으로 옮겼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빛 반사를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중세 시대에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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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 October  2025  vol.113
CLASSIC


B E H I N D  S T O R Y


‘근거 있는’ 자신감의 화가 

얀 판 에이크

newl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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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북유럽 미술의 판도를 바꾼 예술가가 있었다. 얀 판 에이크는 유화라는 화법을 극도로 발전시키며 빛과 색채, 그리고 세밀한 디테일로 현실을 화폭 안에 담아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현실을 사진 찍은 것처럼 그림으로 옮겼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빛 반사를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중세 시대에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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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1.
유화로 완성한 디테일

얀 판 에이크는 흔히 ‘유화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유화의 발전과 정립에 공을 세운 일인자이기 때문이다. 얀 판 에이크 이전, 화가들은 주로 템페라라는 물감을 사용했다. 템페라는 달걀노른자를 안료에 섞어 만드는데, 재료가 빠르게 마르고 세부적인 표현이 어려웠던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얀 판 에이크는 기름과 안료를 혼합한 유화를 사용해, 수정이 용이하고 여러 겹의 칠로 질감과 색의 깊이를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그는 이 기법을 극한까지 발전시켜, 천의 광택, 금속의 반사, 보석의 반짝임과 같은 사실적인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롤랭 재상과 성모마리아(1435)>에서 이러한 유화의 혁신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입고 있는 로브의 주름과 빛의 반사는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사실감을 보여주었다.

롤랭 재상과 성모마리아(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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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2.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

15세기 중반, 이탈리아와 북유럽 회화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해부학, 투시원근법 같은 과학적 이론과 이상적 미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는 현미경이나 확대경을 통해 바라본 듯하게 냉철한 관찰을 통해 대상의 구체적 형상이나 질감을 재현하는데 충실했다. 얀 판 에이크의 작품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화 기법을 바탕으로 극한의 세밀함과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눈앞의 현실처럼 대상을 그려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은 당시 흔했던 결혼 초상화 형식을 취하지만, 얀 판 에이크는 인물뿐만 아니라 공간의 세부 묘사에 주력했다. 나무로 짠 침대의 질감, 샹들리에의 금속광, 그리고 탁자 위의 과일까지 모두 극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더불어, 거울에 비친 뒷모습과 이를 통해 암시되는 화가 자신까지 담아낸 구도적 창의성은 관찰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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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3.
시대가 축복한 화가

얀 판 에이크는 1425년부터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인 필리프 3세에게 발탁되어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필리프 3세 집권기에 부르고뉴 공국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고 선진 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는 궁정에서 화가 역할뿐 아니라, 외교 임무도 맡아 먼 지방이나 국가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쌓았다. 이는 그가 많은 방면에서 다재다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외교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더 독창적이고 폭넓은 회화 양식을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궁정 화가 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여유로워져 예술적 자유도가 높아졌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와 환경을 잘 만난 행운의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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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4.
시대가 축복한 화가

얀 판 에이크는 독창적인 기술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북유럽 회화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회화를 자신의 정체성과 철학을 담아내는 매체로 활용했다. 특히 초상화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담아내는 데 집중했는데 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초상(1433)>는 그러한 철학과 스타일이 응축된 대표작이다. 얼굴의 주름과 붉은 샤프롱1)의 질감은 세밀한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표현됐으며, 작품 속 대상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그의 관찰력과 유화 기법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보여준다. 액자의 상단엔 그리스어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AΛΣ IXH XAN)”이라고 쓰여있는데, 그의 예술적 자부심을 겸손과 함께 드러내는 문구다.

1) 샤프롱(Chaperon): 중세 시대 사용한 어깨까지 내려오는 두건

남자의 초상화(1433)






얀 판 에이크는 뛰어난 회화 기술을 활용해 그림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그의 작품은 당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예술과 현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으며, 세밀함 속에서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살던 시대와 환경은 그의 재능이 빛날 기회를 제공했고, 얀 판 에이크는 이를 놓치지 않고 미술사에 길이 남을 유산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새롭게 보아야 할 세상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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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1.


유화로 완성한 디테일

라파엘로는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 사망 후, 당대 최고 화가였던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제자가 되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페루지노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제작한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였는데, 21세의 나이에 그는 스승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성모의 결혼(1504)>은 라파엘로가 스승 페루지노의 작품을 같은 제목과 구도로 그린 작품이다. 당시 모방은 현대의 표절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을 담은 오마주였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모방작은 원작보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더욱 잘 표현된 입체감, 공간감으로 스승을 뛰어넘었다. 이는 결국 그를 독보적인 화가로 자리매김시켰다.


롤랭 재상과 성모마리아(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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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BEHIND STORY 2.


북유럽 르네상스의 선구자

15세기 중반, 이탈리아와 북유럽 회화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해부학, 투시원근법 같은 과학적 이론과 이상적 미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는 현미경이나 확대경을 통해 바라본 듯하게 냉철한 관찰을 통해 대상의 구체적 형상이나 질감을 재현하는데 충실했다. 얀 판 에이크의 작품에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화 기법을 바탕으로 극한의 세밀함과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눈앞의 현실처럼 대상을 그려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은 당시 흔했던 결혼 초상화 형식을 취하지만, 얀 판 에이크는 인물뿐만 아니라 공간의 세부 묘사에 주력했다. 나무로 짠 침대의 질감, 샹들리에의 금속광, 그리고 탁자 위의 과일까지 모두 극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더불어, 거울에 비친 뒷모습과 이를 통해 암시되는 화가 자신까지 담아낸 구도적 창의성은 관찰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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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3.


시대가 축복한 화가

얀 판 에이크는 1425년부터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자인 필리프 3세에게 발탁되어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필리프 3세 집권기에 부르고뉴 공국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고 선진 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는 궁정에서 화가 역할뿐 아니라, 외교 임무도 맡아 먼 지방이나 국가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쌓았다. 이는 그가 많은 방면에서 다재다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외교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 더 독창적이고 폭넓은 회화 양식을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궁정 화가 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여유로워져 예술적 자유도가 높아졌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와 환경을 잘 만난 행운의 화가였다.


남자의 초상화(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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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STORY 4.


“난 이런 화가입니다”

얀 판 에이크는 독창적인 기술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북유럽 회화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회화를 자신의 정체성과 철학을 담아내는 매체로 활용했다. 특히 초상화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담아내는 데 집중했는데 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초상(1433)>는 그러한 철학과 스타일이 응축된 대표작이다. 얼굴의 주름과 붉은 샤프롱1)의 질감은 세밀한 묘사를 통해 생생하게 표현됐으며, 작품 속 대상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그의 관찰력과 유화 기법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보여준다. 액자의 상단엔 그리스어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AΛΣ IXH XAN)”이라고 쓰여있는데, 그의 예술적 자부심을 겸손과 함께 드러내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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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에이크는 뛰어난 회화 기술을 활용해 그림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그의 작품은 당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예술과 현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으며, 세밀함 속에서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려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가 살던 시대와 환경은 그의 재능이 빛날 기회를 제공했고, 얀 판 에이크는 이를 놓치지 않고 미술사에 길이 남을 유산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새롭게 보아야 할 세상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1) 샤프롱(Chaperon): 중세 시대 사용한 어깨까지 내려오는 두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