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BEHIND STORY

B E H I N D   S T O R Y



신이라 불린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

 


newlooks


May · June  2025  vol.111
CLASSIC


B E H I N D  S T O R Y


신이라 불린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

newlooks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 그는 완벽함과 매력을 지닌 ‘화가들의 신’으로 불리며, 예술적 재능과 훌륭한 인품으로 후대에 존경받았다. 후대의 화가 앵그르는 “레오나르도는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라며 그를 추앙했다. 선배 화가였던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역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했다. 37년의 짧은 생애에도 ‘고전미술의 완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라파엘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19세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BEHIND STORY 1.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라파엘로는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 사망 후, 당대 최고 화가였던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제자가 되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페루지노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제작한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였는데, 21세의 나이에 그는 스승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성모의 결혼(1504)>은 라파엘로가 스승 페루지노의 작품을 같은 제목과 구도로 그린 작품이다. 당시 모방은 현대의 표절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을 담은 오마주였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모방작은 원작보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더욱 잘 표현된 입체감, 공간감으로 스승을 뛰어넘었다. 이는 결국 그를 독보적인 화가로 자리매김시켰다.

시스티나 성모(1513-1514)


BEHIND STORY 2.
천재에게 배운 천재

스승 페루지노의 공방을 떠나 피렌체로 향한 그는 르네상스의 또 다른 천재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접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1503)>, <성 안나와 성 모자(1501-1519)>에 영향을 받아 초상화와 성모자 그림에서 깊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수많은 성모를 그린 라파엘로는 ‘가장 아름다운 성모를 그린 화가’로 불리게 되었다.

BEHIND STORY 3.
교황이 선택한 화가

라파엘로의 재능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눈에 띄어, 당시 바티칸 재건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이 중 <아테네 학당(1509-1511)>은 철학자들과 지성인 54인을 한데 묘사하며 지식과 지혜를 기원한 걸작으로, 라파엘로는 플라톤에 레오나르도를, 헤라클레이토스에 미켈란젤로를 투영해 그들을 존경했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베일을 쓴 여인(1514-1515)




BEHIND STORY 4.
제빵사의 딸

라파엘로에게는 제빵사의 딸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연인이 있었다. 귀족 신분의 그와는 사회적 격차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뮤즈이자 평생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비비에나 추기경은 그를 자신의 조카 사위로 삼으려 했고, 라파엘로는 약혼식만 치른 채 결혼은 미루며 은밀히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시스티나의 성모>, <베일을 쓴 여인> 등 여러 작품에 마르게리타를 모델로 삼으며 사랑을 표현했다. 37세의 생일에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판테온에 묻혔고, 국가적 예우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의 뮤즈였던 마르게리타는 수녀가 되어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마치 영웅담처럼 절정의 시기에 갑작스럽게 단명한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였음에도 그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부와 명예, 권력, 그리고 후대의 칭송까지 모두 누렸던 라파엘로. 신이라 불릴 만큼 완벽했던 예술가이기에 그의 짧은 인생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참고   Youtube 아트레킹

아테네 학당(1509-15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 그는 완벽함과 매력을 지닌 ‘화가들의 신’으로 불리며, 예술적 재능과 훌륭한 인품으로 후대에 존경받았다. 후대의 화가 앵그르는 “레오나르도는 천국을 약속했고, 라파엘로는 천국을 주었다”라며 그를 추앙했다. 선배 화가였던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역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했다. 37년의 짧은 생애에도 ‘고전미술의 완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라파엘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19세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BEHIND STORY 1.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

라파엘로는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아버지 사망 후, 당대 최고 화가였던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제자가 되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페루지노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제작한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화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체화하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였는데, 21세의 나이에 그는 스승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성모의 결혼(1504)>은 라파엘로가 스승 페루지노의 작품을 같은 제목과 구도로 그린 작품이다. 당시 모방은 현대의 표절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경을 담은 오마주였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모방작은 원작보다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더욱 잘 표현된 입체감, 공간감으로 스승을 뛰어넘었다. 이는 결국 그를 독보적인 화가로 자리매김시켰다.


시스티나 성모(1513-1514)
BEHIND STORY 2.


천재에게 배운 천재

스승 페루지노의 공방을 떠나 피렌체로 향한 그는 르네상스의 또 다른 천재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접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1503)>, <성 안나와 성 모자(1501-1519)>에 영향을 받아 초상화와 성모자 그림에서 깊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수많은 성모를 그린 라파엘로는 ‘가장 아름다운 성모를 그린 화가’로 불리게 되었다.


BEHIND STORY 3.


교황이 선택한 화가

라파엘로의 재능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눈에 띄어, 당시 바티칸 재건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 이 중 <아테네 학당(1509-1511)>은 철학자들과 지성인 54인을 한데 묘사하며 지식과 지혜를 기원한 걸작으로, 라파엘로는 플라톤에 레오나르도를, 헤라클레이토스에 미켈란젤로를 투영해 그들을 존경했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BEHIND STORY 4.


제빵사의 딸

라파엘로에게는 제빵사의 딸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연인이 있었다. 귀족 신분의 그와는 사회적 격차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뮤즈이자 평생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비비에나 추기경은 그를 자신의 조카 사위로 삼으려 했고, 라파엘로는 약혼식만 치른 채 결혼은 미루며 은밀히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시스티나의 성모>, <베일을 쓴 여인> 등 여러 작품에 마르게리타를 모델로 삼으며 사랑을 표현했다. 37세의 생일에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판테온에 묻혔고, 국가적 예우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의 뮤즈였던 마르게리타는 수녀가 되어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마치 영웅담처럼 절정의 시기에 갑작스럽게 단명한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였음에도 그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부와 명예, 권력, 그리고 후대의 칭송까지 모두 누렸던 라파엘로. 신이라 불릴 만큼 완벽했던 예술가이기에 그의 짧은 인생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참고   Youtube 아트레킹

베일을 쓴 여인(1514-1515)